병역특례를 할 때 GPAD를 깨버린 적이 있었다. 회사 비품을 고장냈다고 개인이 무조건 물어내진 않는다. 회사에 따라 다른 걸로 안다. 근데 그 때의 난 그냥 내 돈 20만원을 날려서 GPAD를 고쳤다. 아무도 내게 돈을 주진 않았다. 그냥 잘했단 말만 들었다.
흡착기 장비를 제어하면서 예외처리를 못 해 특정 부품을 고장냈다. 그 것도 바보같이 5분 새에 2개를 작살내놨다. 멘탈이 다 부서졌다. 곧장 아내한테 전화를 했다. 울먹이며 여길 그만두고 싶다고 했다. 아내는 청내공이 있으니 참으라고 했다. 아마 물어내라고 하지도 않을 것이고, 너같은 실수 한 사람 또 있었을 것이라며 날 달랬다. 지금 생각하니 참 어렸다. 아내도 일하느라 힘들었을텐데 침착히 날 달래줬다. 물론 이 사건은 지금도 아내의 안주거리이다.
마음을 추스르고 상사의 욕을 들으며 상황을 수습했다. 이 시기에 아빠가 중고SUV를 하나 준다했다. 근데 아내가 취소했다. 내가 언제 그만둘 지 모르니 아직 차는 시기상조라는 것이다. 그래서 그냥 취소됐다.
이런 사건들이 쌓이니 이 곳은 내게 즐거운 곳이 아닌 힘든 곳이 됐다. 해외 출장은 힘들긴 했으나 재밌었다. 근데 "힘드니" 재미도 반감됐다. 국내도 출장도 마찬가지다. 또 어떤 날은 신입분이 내가 해결 못한 에러를 구글링으로 해결하는 걸 지켜봐야 했다. 그 분은 계속 칭찬만 듣는 데 날 계속 혼나는 날도 있었다. 그러니 더 우울했다. 그 분이 더 노력했고 성격도 좋았고 난 그렇지 못 했다. 그러니 당연한 결과다. 그래도 난 나 자신의 적성을 진지하게 고민했다. 적성에 맞으면 더 노력하지 않을까 생각했다. 열등감에 견디기 힘든 것도 있었다.
해외 업체의 팀뷰어로 인해 리듬이 깨지거나 갑자기 출장지로 끌려가게 되는 일을 겪으니 너무 피곤했다. 어느 정도 익숙해진 것도 있지만 어떤 부분은 익숙해지려고 해도 익숙해 질 수 없었다. 공장 고객사들은 늘 생산 타임에 쫓긴다. 그 압박이 내게 그대로 전해지니 나 역시 압박을 느꼈다.
무엇보다 난 저 흡착 장비때문에 너무 힘들었다. 저 장비 2번째 버전이 나올 당시였다. 1번재 장비를 몇 달간 봤으니 2번째는 내가 담당하게 됐다. 근데 난 여전히 설계가 뭔지 모르고 INPUT OUTPUT도 이해가 안 됐다. 본부장님이 장비 구동 원리를 물어봤는 데, 대답을 제대로 못했다. 1번째 장비가 PC랑 PLC가 같이 된 거고 2번재는 PC장비였다. 1번째 장비에서 PLC 파트를 하신 분이 구동원리를 제대로 알려주자 본부장님은 폭발하셨다. 그래서 난 탈탈털렸다.
사실 난 이시기에 이 분께 불만이 쌓이고 있었다. 입사초기와는 다르데 나한테만 유독 짜증을 내거나 날 싫어하는 게 티가 났기 때문이다. 그래서 난 그거에 대해서 불만을 토로할 지 고민했다. 근데 그 분이 내게 먼저 분노를 쏟아낸 것이다. 수치스러웠고 모욕감을 느꼈다. 그 분은 내가 석사를 나온 것에 대해서도 얘기하셨다. 석사를 나왔는 데 왜 이 것밖에 못 하냐며 윽박질렀다. 순식간에 내 맘속에서 이 분은 너무 무서운 분이 됐다. 이 분이 너무 무서워져서 움찔거리게 됐다.
같이 의지하던 동료들의 태도도 조금씩 변했다. 뭘 물어보면 같이 고민하고 알려줬는 데 이젠 코드를 보라는 말을 할 뿐이다. 물론 그 말만 하진 않고 설명해 줄 때도 있었지만, 그래도 대체론 코드를 보라고 했던 것 같다.
이런 저런 지적도 당했다. 내가 메일을 쓰거나 글을 쓰면 무슨 말인지 모르겠단 말도 많이 들었다. 책 좀 보라는 얘기도 들었다. 더 슬픈 건 내가 쓴 글을 친구들에게 보여줘도 같은 말을 했단 점이다.
이런 모든 사건들이 내겐 너무 자존심이 상했다. 그리고 흡착장비 2번째 버전은 결국 다른 분에게 넘어 갔다. 내가 한 일이라곤 테스트 그리고 또 테스트였다. 이 시기에 지인에 의해 이직 제안도 받았다. 상도덕도 있고 청내공도 약 1년 남은 상태라 거절했다. 그리고 이 시기에 내가 말한 그 스타트업에서도 이직 제안을 받았다. 나 혼자 갈 자신은 없어서 같이 갈 사람을 모집했는 데 다들 적극적이지 못해서 나 역시 한 발 물러섰다. 여기서 도망쳤다간 그 스타트업에서 또 도망칠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내가 한 일은 하나였다. 청내공 만기를 목빠져라 기다린 것이다. 청내공 끝나자마자 퇴사 하기엔 미련도 있었다. 동갑 내기 다른 부서 사람들이랑 친해져서 지금도 만나는 사이인 것과, 직접 기구를 조립하는 쪽에선 날 인정해주고 좋아해줬다는 점이다. 본부장님한테만 미움을 받았지 나머지 분들은 날 그렇게 싫어하지 않았다. 재밌는 건 내게 무관심하거나 날 싫어한다고 생각했던 분도 내가 나간다고 하니 되게 아쉬워하셨단 점이다.
이렇게 싱숭생숭한 상태에서 독일 전시회를 갔다. 내겐 참 감사한 기회였다. 보통 전시회는 영어 능통자가 가는 데 거기에 내가 낀 것이다. 우리 부서에 영어 능통자가 있었으나 그 분 한 분이 장비를 다 맡을 수 없기에 내가 간 것이다. 물론 장비 SW 수정 및 테스트하느라 또 고생했지만 그래도 내겐 좋은 기회였다.
출장에 대한 마음이 식으니 난 계속 숙소에서 잠만 잤다. 일 할 땐 일 하고 같이 움직일 땐 같이 움직였지만, 휴일엔 잠만 잤다. 나가지도 않았다. 다른 사람들은 재밌게 쇼핑할 때 난 쳐박혀 있었다. 우울했던 것 같다. 생각보다 재미 없었다. 멕시코 처음 갔을 땐 너무 재밌었는 데 유럽 출장은 재미없었다. 그러다보니 마음은 더 식었다. 그리고 많이 괴로웠다.
결국 난 퇴사를 결심했다. 친구하기로 한 녀석 한 명이 먼저 퇴사를 했고 나를 자주 같이 다니던 후임분 역시 퇴사하기로 한 것이다. 그러다보니 내 마음도 그리로 기울었다.
나의 퇴사 사유들을 다시 정리하자면 이렇다.
1. 인간관계가 좋아서 즐거웠으나 이젠 즐겁지 않았다. 내가 속한 부서에서 제일 높은 사람이 너무나도 무서웠다. 싫은 거랑은 좀 다르다. 무서웠다.
=> 이젠 좀 극복된 것 같다. 내가 강사가 되고, 이 분이 내 제자들 앞에서 최근에 강의를 하시게 됐다. 결과적으로 내 제자는 내가 입사하고 5년 뒤에 같은 날에 이 직장에 취직하는 쾌거도 이뤘다.
2. 인간 관계가 위축되다보니 회사 다니는 게 너무 스트레스였다. 고객들이랑도 잘 지내는 사람도 있었지만 힘들게 하는 사람도 있었다.
3. 몸이 썩어 간다는 느낌이 들었다. 잦은 팀뷰어와 출장으로 정말 몸이 썩는 기분이 들었다. 워라벨은 꿈도 못 꾸는 것 같았다. 내가 일을 잘 한다면 칼퇴도 할 수 있겠지만 거의 칼퇴를 못 했다. 근무 시간에 제대로 집중을 못 하는 경우도 있었다. 어떤 날은 슬럼프에 걸려서 하루 종일 멍 때린 날도 있었다. 이런 것들이 쌓이니 더 야근했던 것 같다.
4. 내 후임으로 오신 분이 나한테 질문하면서 나중엔 나보다 더 잘하게 됐다. 이건 분명 적성의 문제같다. 그 분이 노력하신 것도 분명 있지만 그게 다는 아닐 거란 생각이 들었다.
5. 청내공 만기가 정해지니, 심리적으로 만기가 끝나면 회사도 끝날 것이란 생각을 한 것 같다. 게다가 이직 제안도 두 번이나 받으니 마음도 더욱 싱숭생숭했다.
요약하자면
인정도 못 받고 몸만 축나고 적성에도 안 맞는 것 같다는 것이다.
강사를 하면 안 좋단 말을 커뮤니티 글에서 봤다. 장기적으로 보면 분명 강사보단 개발자가 낫다는 의견이 압도적이었다.
사실 이 부분은 지금도 고민이긴 하다. 지금이라도 개발자로 돌아가야 하나 가끔 고민한다.
기도를 해보면 견뎌야 할 것 같았다. 이 때 읽고 있던 본문이 에스겔이었다. 에스겔이 처참한 상황 가운데 계속 처해있었던 것처럼 나도 그래야 하나 싶었다. 그래야 하나님을 더 의지하니 그래야 하나 싶었다.
이 때 힘이 된 건 아내의 말과 지지였다. 그리고 나 자신의 마음을 끊임없이 살피며 성찰한 것도 도움이 됐다.
신앙서적인 줄 알고 있었으나 신앙서적은 아닌 것 같은 책 덕에 나는 나 자신을 더 돌아보게 됐다.
삶이 내게 말을 걸어올 때(파커 J. 파머)에선 나 자신에 대한 이야기가 전부다. 물론 내가 잘못 읽은 걸 수도 있다. 하여튼 내겐 그렇게 느껴졌다.
1. 잘난척하고 뽐내는 걸 좋아하는 네게 강사는 딱이야
2. 한 번 해봐
라는 아내의 말
나 자신을 돌아봤을 때 개발자는 확실히 아냐. 그래 한 번 해보기라도 하자.
이런 말들이 뭉치고 뭉쳐서 나는 결국 승부수를 띄웠다.
퇴사를 통보한 것이다.
씁쓸하게도 설득은 없었다. 팀장님이 빈말로 한 번 설득해줬다. "부족하지만 난 네가 좋다"
부족하지만 이라는 말이 날 더 아프게 했다.
내가 보기엔 난 쓸만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평가는 냉정했다. 경력자+석사인 나보다 순수 신입인 내 선임들이 먼저 승진했다. 기껏해봐야 석달차이인 데 누군 승진하고 누군 못 했다. 그리고 지금 돌이켜보면 난 정말 부족했다. 클래스를 비롯한 문법 기초가 안 되다보니 코드에 대한 이해도가 상당히 떨어졌다. 내가 이렇게 못 하는 동안 그 분들은 이 걸 다 극복하셨던 것 같다. "공부 좀 더 할 껄" 이 후회를 퇴사하고 나서 했다. 퇴사하고 나서 c#책을 정독하게 되면서 하게 됐다. 그래도 후회는 없다.
강사가 되고 나선 내가 그만둔다고 할 때 마다 사람들이 잡는다.
필사적이기까지 하다.
하지만 개발자땐 늘 아니었다.
내가 그만둔다고 하거나 내가 나갈 시기가 되면 아무도 잡지 않았다. 심지어 떠밀려서 나가기까지 했다.
원랜 단순 컴퓨터 학원 강사나 언플러그드 코딩(어린아이 코딩)이런 걸 하려고 했다.
근데 보수가 맞지 않아 안 했다.
사람인을 계속 뒤져보다가 국비 학원 강사 모집 글을 발견 했다. 내가 원하는 보수였다.
내가 개발자로서 받던 보수가 워낙 낮아서 그런지 강사로 전직했는 데 돈을 더 많이 받게 됐다.
감사했던 건 보통 퇴사가 확정된 상태에서 폴란드 출장을 또 간 것이다.
원래 퇴사 확정되면 국내나 해외 출장을 보내지 않는다고 한다. 실제로 어떤 분은 독일을 가기로 하셨다가, 퇴사 통보하시고 나서 출장을 못 가게 되셨다. 나 역시 그렇게 될 것 같았다. 근데 또 가게 됐다. 게다가 혼자 간 것도 아니었다. 다른 부서 사람들이랑 같이 움직였고, 그 곳에서 만난 폴란드 대리점 사람이랑 너무 재미있게 일했다.
이제 이 시리즈를 끝낼 수 있게 됐다.
그래도 내 제자가 그만두기 전까진 끝냈다.
이제 난 곧 있으면 국비 학원 3년차가 된다.
적어도 여기 그만두기 전까진 이 글을 마무리짓고 싶었다.
다행히 마무리가 됐다.
그만두고 난 뒤의 이야기도 있으나 적지 않겠다.
어쨌든 이 글의 제목은
내가 왜 프로그래머를, 개발자를 그만두고
가르치는 사람이 됐느냐 이기 때문이다.
프로그래밍을 가르치게 되면서 공부도 많이 하게 됐고
설명도 많이 하다보니 실력도 는 것 같다.
그래서 다시 돌아가야 할까 미련이 생기기도 한다.
하지만 난 지금도 후회는 없다.
난 말귀를 못 알아듣고 일머리가 약하다. 하지만 내가 아는 건 잘 가르쳐 주는 편이다.
그러니 말귀 잘 알아듣고 멘탈 좋은 내 제자들이 내가 못 다한 꿈을 이뤄줄 것이다.
개발 전혀 모르는 사람이 나한테 배우고 개발 잘 하고 취직을 하는 모습을 계속 지켜보니 너무 뿌듯하다.
강사에 대해서 막연히 두려워하고
개발자를 그만두면 죽는 줄 알았던 지난 날들이 아쉽기도 하다.
하지만 이 역시 후회없다. 짧게 나마 필드 경력이 있으니 학생들한테 해줄 이야기가 많다.
그래서 난 지금의 내가, 내가 가진 경험들이 딱 좋다.
두서없이 막 적은 것 같은 데, 나중에 기회가 되면 리메이크하고 싶다.
코딩 학습서나 위키독스같은 책도 좋지만
이런 이야기류의 책이 더 잘 팔리기에
한 번 써보고 싶다.
이젠 글을 마쳐야 겠다.
혹시 제 글을 여기까지 다 읽으신 분이 계신다면
진심으로 감사드리고 싶습니다.
뭘 하시든 잘 될 것이며,
고민되시는 분들은 부담가지지 말고 질문주세요.
특히 개발자인 데 강사로 전직을 원하시는 분들은 편하게 질문 주세요.
누군가는 개발자가 적성에 맞을 것이고
누군가는 저처럼 강사가 적성에 맞을 것이고
누군가는 전혀 다른 일이 적성에 맞을 것입니다.
우리 모두 자기에 딱 맞는 옷을 입었으면 좋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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