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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왜 프로그래머를 그만두었는가?(完)

나는 왜 프로그래머를 그만두었는가? (17)

좋았던 기억은 많다. 시간이 무한정 주어진다면 더 많이 풀어낼 수 있을 것 같다.

 

멕시코에서나 인도에서나 즐거운 기억들이 대다수이다. 일이 잘 안 풀려서 출장이 연장될까봐 조마조마했지만 위기들을 잘 넘겼던 것 같다. 두 번째 멕시코 출장에선 출장이 몇 주 연장됐지만 그 건 내 잘못이 아니었다. 다른 직원들도 모두 발이 묶이는 상황이었으니 말이다. 

 

국내 출장에서 장비 하나를 맡게 됐다. 흡착기였는 데, 이 장비때문에 고생을 정말 많이 했다. 예외처리 못 해서 장비가 부서지는 걸 눈앞에서 보기도 했다. 어떤 경우엔 내가 가고 나서 장비가 부서진 경우도 있다. 센서 문제인 경우도 있었고 내 잘못인 경우도 있었다. 이 장비 때문에 엄청 많이 끌려갔고, 그 공장에서 잠도 많이 잤다. 나중엔 그 공장 통근 버스로 출퇴근했고, 공장 식당에서 밥을 먹었으며, 직원들에게 제공되는 음료수와 야식 빵까지 먹었다. 

 

서울 전시회도 갔다. 이 곳은 내게 너무나 특별한 곳이다.

 

왜냐면 교직원때 이 근방에서 교육을 받은 적이 있기 때문이다. 서울에서 교육받는 데 팀장한테 메일로 혼났었다.

서울에서 교육을 받으니 부모님을 만나서 밥을 먹는 데 즐겁지 않았다. 나의 우울함은 같이 올라온 아내에게 그대로 전염됐다. 돌아오는 길에 이 전시회장쪽에 들를 일이 있었다. 이 곳을 혼자서 거닐며 미친듯이 고민했다. 그만둘까? 말까? 계속 고민했다. 정말로 미친듯이 고민했었다. 기껏 교육보내놓고서 메일로 뭐라고 한 팀장한테 화가 나기도 했다. 이 시기에 내가 멘토로 생각하는 분께 연락을 드려봤다. 이 분은 이 시기에 할머니가 돌아가셔서 힘든 시기였다. 그래서 결국 고민은 온전히 나의 몫이 됐다.

 

그 장소를 다시 오게 됐다. 멋진 양복을 입고 회사 장비를 설명하고, 오작동에 대응하기 위해서 온 것이다. 이 때도 내가 개발한 장비가 아니라 잘 모르는 장비였다. 그래도 다시 한 번 감개무량에 젖었다. 교직원때의 기억이 떠오르며 계속해서 미소짓게 됐다. 계속 서있느라 다리도 아팠고 밥 먹기도 좀 힘들었다. 그래도 그 때의 내가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여기선 적어도 내가 쓸 모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더 기뻤던 것 같다.

 

이 때 사장님이 술을 권해서 곤혹스럽긴 했다. 그 거 빼곤 모든 게 좋았다. 타부서 분이랑 방 같이 썼는 데 즐거웠다. 고기도 많이 구워먹었던 것 같은 데, 다 맛있었다. 재밌고 맛있는 기억들이 많다. 혹은 그 때 당시엔 되게 싫었던 것들이 지금은 그립기도 하다.

 

갑자기 팀장님께 전화가 왔다. 폴란드로 날아가라는 것이다. 장비 2개(정확히 말하자면 4개인 데 종류상 2개)를 봐야 한단다. 간단한 이슈니 해결하고 오란다. 내가 맡은 장비도 아니었고 작동을 거의 모르나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아시아랑 아메리카를 가봤으니 유럽도 가보고 싶었다. 가슴이 두근거렸다. 전시회 출장에 이어 해외출장을 바로 가니 더 즐거웠다. 인정받는 기분이 좋았다. 날 필요로 한다는 사실이 기뻤다.

 

폴란드에 처음 가선 좋았다. 근데 여기도 문제가 많았다. 내가 해결해야 할 문제는 제시간에 해결했다. 근데 생각지도 못한 문제가 계속 나왔다. 그 중에 절정은 귀국 직전에 발견한 문제인 것이다. 그 것은 명백한 문제였다. 고객이 당장 쓰는 옵션은 아니고, 필요없다고 한 옵션이지만, 어쨌든 고치긴 해야 하는 문제다. 이 것 때문에 한 1주일 연장했다. 이 때 코드를 더 자세히 뜯어본 것 같다. XOR (^)을 생전 처음 봤다. 사인 코사인은 왜 있는 지도 몰랐다. 그래도 우여곡절끝에 뜯어 고쳤다. 거의 모든 부호를 반대로 바꿨다. 그리고 그 장비에 대해서만 branch를 새로 땄다. 지금도 그 branch가 있는지 모르겠다. 그 때나 퇴사 직전에나 이게 최선이었다.

 

이거 해결한다고 현지인에게 'are you crazy'소리까지 들었다. 토요일 일요일에도 해당 근무지에 콜택시 잡아달라 했기 때문이다. 출장와서 쉴 순 없었다. 원랜 gg치고 집에 가고 싶었다. 근데 본부장님은 그걸 해결하기 전까진 돌아오지 말라 하셨다. 그 장비는 그 곳에 있는 장비이며 국내에는 없으니 그 곳에서 테스트해서 고치고 오라는 것이다. 충분히 일리있는 말이었다. 출장비를 축내는 게 눈치보였는 데, 본부장님이 그렇게 허락해주시니 좀 더 힘내서 봤던 것 같다.

 

참고로 이 당시 난 운전을 못 했다. 국내 출장을 갈 때 늘 택시+대중교통 혹은 대중교통 혹은 CS 직원과 동행을 했다. 어떤 경우엔 출장지 직원이 태워다줬다. 해외출장에선 콜택시를 타거나 대리점 직원이 태워다줬다. 내가 운전을 시작한 건 이 회사를 퇴사하기 직전이었다. 법인차를 긁을까봐 두려워 운전을 못하기도 했지만, 내겐 차가 없었다.

 

원래 차가 더 빨리 생길 수 있었다. 근데 위에서 말한 흡착기 때문에 내 첫 차는 한참뒤에 생기게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