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나는 왜 프로그래머를 그만두었는가?(完)

나는 왜 프로그래머를 그만두었는가? (15)

이제 내 직전 회사 이야기를 해보자. 이 회사는 C#과 MFC를 주로 하며 예전엔 VB도 다뤘다고 한다. 

 

구직 기간 동안 총 3 곳의 회사를 면접 봤다. 한 군데에선 나를 마음에 들어 했으나 내가 싫었다. 또 한 군데는 나도 거기가 싫었고 거기도 날 불합격시켰다. 퇴사 예정일은 다가 오고, 마지막 회사를 면접보게 된 것이다. 그 마지막 회사가 나의 직전 회사다. 여기까지 안 되면 백수가 된 상태로 구직해야 했다.

 

잡플래닛을 보니 이 곳은 평이 별로였다. 솔직히 이름부터 마음이 들지 않았다. 내가 교직원으로 지냈던 곳과 영어 이니셜이 똑같으니 더 싫었다. 하지만 선택지가 없었다. 더 이상은 실력 좋다는 거짓말은 하기 싫었다. 실력이 없는 걸 솔직히 말하고 대신 열심히 하겠다는 걸 어필하고 싶었다. 

 

나쁜 평들 가운 데 눈에 띄는 부분들이 보였다.

업무 난이도는 쉬우나 잔업이 많다, 해외 출장이 많다, 사람들은 괜찮으나 일부 사람들만 좀 이상하다는 내용들이다.

 

이건 내가 감수할 수 있는 부분들이며, 내게 매력이 되는 부분들이었다. 업무 난이도가 쉬운 데, 잔업이 많으면 야근하면 된다. 야근은 교직원 때도 수없이 했다. 거기선 야근해도 욕먹었다. 출장이 많은 점 또한 내겐 매력이었다. 병역 특례때 난 출장을 좋아하는 편이었다. 장롱면허라서 영업 사원분이랑 같이 다니거나 혼자 대중교통을 이용해 다녔다. 사무실을 나와 바깥바람을 쐬면 늘 기분이 좋았다. 차 안에서 대화를 나누는 시간들은 재밌었고, 그들이 사주는 휴게소 간식은 맛있었다. 일부 사람만 이상한 데 사람들이 괜찮다는 부분도 좋았다. 난 내가 속한 팀에서 은따 혹은 왕따였다. 정확히 말하면 그 분들이랑 내가 맞지 않았으며 내가 첫 단추를 잘못 끼웠다. 그 일부 사람만 조심해서 나머지랑은 잘 지내고 싶었다.

 

병역 특례가 끝나고 대학원 복학 후 학회 참석차 아내와 미국에 간 기억, 병역 특례 전 방장 형님 덕에 프랑스에 간 기억들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비행기 안에서의 시간은 10시간이 넘었지만 내겐 1시간처럼 짧았으며 즐겁고 달콤했다. 다시 비행기를 탈 수도 있다고 생각하니 너무 설렜다. 

 

이력서를 넣었고, 연락은 바로 오지 않았다. 그래도 어느 날 연락은 왔다. 면접 일정이 잡혔다. 면접장을 오며 가는 길부터가 스펙타클했다. 버스를 타도 1시간 남짓, 자전거를 타도 1시간 남짓이라서 난 자전거를 탔다. 죄인된 심정이기에 차비라도 아껴볼 심산이었다. 통학을 자전거로 했으니, 그 자전거 그대로 타고 면접 장소로 갔다. 면접에 대한 편의는 많이 봐줘서 밥도 혼자서 먹고 면접도 혼자서 편히 다녔다.

 

자전거를 타며 여러 가지 생각을 했던 것 같다. 풍경 감상도 하고, 앞으로 내 인생에 대한 고민도 했던 것 같다. 좀 일찍 출발했으나 물리적 한계로 생각보다 늦었다. 그 때가 1월말이라 발도 너무 시렸고, 생각보다 숨찼다. 잘 닦인 자전거 도로를 달린다지만 계속 평지다보니 생각보다 힘들었다. 거의 다 도착해서 엉뚱한 곳을 헤매기도 했다.

 

회사 위치는 여러 모로 반가웠다. 처형이 사는 곳이랑 가까웠고, 내가 예전에 도전했다가 떨어진 그 회사랑도 멀지 않은 곳이었다. 대학원 복학 후 잠깐 몸 담았던 청년 취업 아카데미때 도전해본 회사인 데 서류 탈락했다. 이유는 나도 모른다. 아마 영어 점수 때문 같다. 아니면 거긴 C# 회사인 데, 내가 C#을 몰라서 그럴 수도 있을 것 같다.

 

내가 이 회사를 선택한 이유 중 하나가 C# 회사라는 점도 있었다. 내가 사람인 공고를 볼 당시엔 C#이 많았다. Java 시장이 훨씬 큰 건 분명 사실이다. 이상하게도 내가 마음에 들어하는 회사들은 모두 C# 회사였다. 그래서 이 회사에 가서 C#을 배우고 싶기도 했다. 이 회사에서 평생 일할 마음보단 C#을 경험해보고 싶은 마음이 컸다.

 

우여곡절 끝에 재시간에 면접장에 도착했다. 회사 외관은 생각보다 좋았다. 경비원으로 계신 분도 너무 친절하셨다. 면접 장소와 시간을 알려주신 담당자 분도 프리해보여서 좋았다. 

 

지원자가 없어서 나 포함 2명이서 면접을 보게 됐다. 인상도 좋으셨고 포스도 있어보이셨다. 개발 경력도 오래 되셨고 가장이시며 사랑스러운 딸을 두셨다. 계속해서 인연을 맺고 싶어 연락처를 교환했고 그 분도 승낙해주셨다. 이 분은 경력자로서 면접을 보시는 상황이고, 나는 신입으로 면접을 보게 됐다.

 

면접은 다대다라고 했으나, 지원자가 2명인 관계로 나부터 들어갔다. 나 혼자에 면접관은 2명이었다. 교직원 면접때보다 훨씬 분위기가 편안했다. 경영 관리 팀의 부장님과 SW팀의 이사님께서 면접을 진행하셨다. 두 분 다 인상이 좋으셨다.

 

내가 면접 본 곳들은 면접관한테 회사 설명 듣는 시간이었다. 그런 데 이번에 면접본 곳들 중 2 곳은 내게 자기 소개를 시켰다. 이런 기본적인 질문을 준비하지 못해 처음엔 망했다. 하지만 여기선 잘 소개했다. 해외 출장 좋아한다는 걸 어필했고 프로그래밍을 좋아한다는 뻥도 좀 쳤다. 사실 뭐라고 말했는 지 이젠 기억도 안 난다. 그 당시 면접 내용을 녹음했으나 아마 지웠을 것이다. 지운 게 후회된다.

 

경영 관리쪽에선 일반적인 내용의 질문들을 했던 것 같다. 어려운 내용들은 없었다. 난 열심히 할 것을 어필했고 내가 위기 관리를 잘 해왔다는 걸 열심히 설명했다. 분위기는 나쁘지 않았다. 연봉은 2800-3000을 불렀다. 교직원 연봉이 2800이라서 그랬다. 직전 직장보다 적게 받고 싶진 않았다. 내가 아무리 못 해도 저 정돈 받고 싶었다. 

 

이사님이 코딩 문제를 내주셨다. c의 swap 문제였고, 절차지향과 객체지향의 차이를 설명해보라고 하셨다.

코딩 문제는 A4에 볼펜으로 적는 문제였다.

포인터가 생각나지 않아 swap은 글로벌 변수를 선언해서 풀었다. #include부터 컴파일 에러없이 잘 적긴 했다. 절차지향과 객체지향에선 엉뚱한 소리를 했다.

리눅스 환경에서 C를 코딩했던 기억이 나서, 절차 지향은 변수를 맨 위에 다 선언해야 하고, 객체 지향은 아니라고 했다.

 

코딩 별로 안 해보신 것 같다는 말을 들었다. c 문제는 100점 만점에 그래도 80점은 주고 싶다고 했다. 잘 모르면 자신이 가르쳐 주겠다는 식으로 얘기하셨다. 회사를 보고, 면접을 보면서 이 회사에서 일하고 싶어졌다. 여기서라면 내 실패한 기억을 지워버리고 다시 시작할 수 있을 것 같다.

 

면접을 즐겁게 봤고, 경력자 분께 바통터치를 했다. "면접 잘 봤어요?" 라고 물어보셨는 데, 내가 좀 성의없게 대답하고 나온 것 같았다. 말을 잘못들어서 이상하게 대답했던 것 같았다.

 

면접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재밌는 사실을 발견했다. 내가 자전거를 두 손 놓고 탈 수 있게 된 것이다. 한 손 놓고 탈 순 있어도 두 손 놓고 타기는 계속 실패했다. 중학생때 자전거 통학을 많이 해왔고, 교직원 생활하던 4개월동안 자전거 통근을 했지만 두 손 놓기는 실패했다. 근데 이게 된 것이다. 그 순간 깨달았다. 나는 성장했으며, 성장하고 있다는 큰 위로를 받았다. 거리는 멀었지만 너무 설렜다. 물론 두렵기도 했다. 한 번 실패한 경험이 있기에 두려웠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나를 지켜주고 계시며, 함께 하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답변은 생각보다 늦었다. 연락처를 교환한 경력자 분과 톡을 주고 받았는 데, 그 분도 연락을 못 받았다고 한다. 물 먹은 것 같다고 한다. 그 분은 그래도 갈 데가 있으셨겠지만 난 아니었다. 정 안 되면 나는 싫었지만, 나를 원했던 그 곳에 가야 했다. 1월 31일까지만 근무를 하기에, 2월 1일부로 난 출근을 해야 했다.

 

결혼 기념일쯤인가 결혼 기념일엔가 저녁 6시 30분에 전화가 왔다. 합격한 것이다.

문제를 풀지 못해서 인지 몰라도 연봉은 2800이었다. 인센티브가 주어질테니 걱정 말라고 했다.

나와 같이 면접본 분은 어떻게 됐는지 물어봤다.

그 분은 나의 팀장으로 들어오게 되셨다.

이 곳 덕분에 그래도 기쁨으로 결혼기념일을 보내게 됐다.

 

교직원 입사때와는 다르게, 설렘보단 두려움이 컸다. 교직원 입사땐 "고생끝 행복 시작"의 마음으로 시작했다면 여기선 "지옥끝 고생 시작" 혹은 "고생끝 다른 고생 시작" 이런 느낌이었다. 좌천되는 기분도 들고 좌절감도 들었다.

 

글이 너무 길어지니 일단 결론부터 말하고 싶다.

 

업무 난이도가 쉽다고 한 건 다른 팀이 쓴 이야기다. 하지만 SW 난이도가 돌이켜보면 그렇게 높은 건 아니었다. 여기서 C#을 많이 해봤기에 강사가 되서 C#을 제일 자신있게 가르치게 됐다. 전국을 누볐으며 해외를 누볐다. 경북 경산, 경기도 이천, 세종시, 전라도 광주 등을 돌아다녔다. 해외는 멕시코, 인도, 폴란드, 독일을 갔고 환승한 것까지 합하면 홍콩, 헝가리, 미국을 갔다. 그만둘 땐 비행기라면 지겹게 느껴졌다. 정말 원없이 다녔다. 해외 업체의 업무에 대응하느라 밤에 팀뷰어 하는 게 힘들었지만 돌이켜 보면 다 추억이다. 사람들이랑 사이가 완벽하진 않았지만 지금도 연락하고 지낸다. 그 분들을 생각하면 늘 감사한 마음뿐이다. 결국 개발자가 나와 맞지 않다는 걸 깨닫고, 직장을 옮겼지만 이 곳은 내게 너무 좋은 곳이었다. 최근엔 내 제자 두 명이 여기 면접도 봤다. 될 지는 모르겠지만 커넥션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의미있다고 본다.

 

더 많은 이야기는 뒤에 또 풀어봐야 겠다.

전직장을 떠올리며 쓰는 데 마음이 훈훈하다. 

입사하고 몇 달 지나지 않아 바로 해외 출장을 가게 됐다. 한국어 패치가 잘 된 외국인이 도와줘서 즐거운 추억도 남기고 재밌게 지내다 왔다. 다음 글은 이 이야기부터 시작해봐야 겠다. 출장 가는 길부터 감성 폭발이었으니 즐거운 마음으로 쓸 수 있을 것 같다. 교직원 이야기 쓸 땐 힘들었는 데, 주제가 넘어가니 쓰는 게 재밌고 즐겁고 설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