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입사하고 5년 뒤 결국 내 제자 한 명은 이 회사에 입사했다.
내 제자가 그만두기 전까진 인간적으로 이 시리즈를 끝마쳐야 겠다.
과연 할 수 있을까? 여기서의 기억들은 하나 하나 모두 소중하다.
힘들었던 기억들 역시 내겐 소중하다.
쓴뿌리였던 기억도 소중하다. 쓴뿌리의 원인들이 제거된 것도 있고 이젠 더이상 쓴뿌리가 아닌 것들도 있다.
당연한 얘기지만 입사할 당시만 해도 난 강사에 대해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니 지금은 감개무량하다. 5년전 내게 지금 이야기를 하면 전혀 안 믿을 것 같다. 입사할 때 난 그만큼 자존감이 낮았다.
입사하고 처음이 가장 즐거웠다. 그 뒤엔 좀 힘들었지만 견딜만 했다. 처음엔 날 포함해서 세 명의 신입사원이 있었다. 개발이 아닌 분까지 하면 총 4명이다. 우리 넷은 꽤 친했던 것 같다. 늘 같이 다니는 정돈 아니었지만 그래도 서로 우호적이었다. 2년차이신 분이 한 분 계셨는 데, 일도 잘 하고 친절했다.
나랑 같이 면접봤던 그 친절한 분이 팀장이 되셨는 데, 친절하고 매너가 좋은 사람이었다. 그 인상은 퇴사할 때까지 거의 안 변했다. 그 분은 지금도 내겐 좋은 사람이다.
첫 출근날 6시에 퇴근을 했다. 한 1주일은 그렇게 한 것 같다. 지하철 한 번 환승하고 버스를 타야 하긴 하지만 그래도 집에 일찍 왔다. 자전거 타고 30분 정도 거리였던 곳보다 퇴근이 빨랐다. 일은 어려워보였지만 분위기도 즐거웠다. 무엇보다 즐거운 건 나만 모르는 게 아니고 비슷한 시기에 입사하신 분들도 다 몰랐다는 것이다. 그래서 서로 의지도 됐던 것 같다.
청년 내일 채움 공제를 알게 됐다. 솔직하게 말하면 이걸 발견한 아내가 원망스러웠다. 그래서 2년 내내 아내를 괴롭혔다. 일부러 괴롭힌 건 절대 아니다. 본의 아니게 아내를 괴롭혔다. 결국 끝까지 견뎠고 돈은 받았다. 다행히(?) 3년형으로 연장이 안 되서 2년 잘 버티고 돈도 잘 받았다. 만약 프로그래머가 내 적성에 맞았다면 더 열심히 했었을 것이다. 결과적으론 내 적성이 아니었다. 지금 강사로서의 삶을 잘 살기에 후회는 없다.
입사 극초반에 출장을 가니 아무 것도 몰랐다. 노트북만 들고가고, 소스코드 안 들고 가서 혼나기도 했다. 소스를 보고, 기계 돌아가는 걸 봐도 뭔지도 몰랐다. 무슨 물품이 어디로 납품된다는 건지 파악도 안 됐다. 말귀를 진짜 못 알아 먹겠더라. CS 직원 분이랑 같은 부서분이랑 총 세명이 출장갈 땐 할만했다. 근데 CS분이랑 둘이서 갈 땐 진짜 부담됐다. 나중엔 아니었지만 초반엔 진짜 부담됐다.
주말내내 고생한 적도 있다. 교직원때랑 다르게 연장근무수당이 전혀 없었지만 자율적으로 출근했다. 이 곳이 교직원보다 좋은 건 밥이었다. 밥의 퀄리티는 조금 떨어져 보였다. 대신 점심과 저녁 모두 공짜이며 눈치 안 보고 먹을 수 있었다. 라면까지 먹을 수 있었다. 계란도 무제한으로 먹을 수 있었다. 교직원때는 점심은 그렇다쳐도 저녁은 돈 내고 먹어야 해서 싫었다. 어떤 날은 본의 아니게 다른 분꺼까지 내가 사야 했다.
주말내내 고생한 내용이 뭐냐면 간단한 통신이었다. 정말 부끄러운 건 내가 인스턴스 생성을 안 해서 주말을 날린 것이다. 지금 돌이켜보면 내가 정말 못하긴 했다. 지금 내 제자들보다 더 못 하는 것 같다. 이런 내 경험들이 있기에 제자들은 더 잘하려나? 글쎄? 모르겠다.
입사 4개월차에 멕시코에 가게 됐다. 본부장님이 만든 프로그램을 설명하면 되는 일이다. 심지어 현지에 한국어 패치된 멕시칸이 있으니 영어를 잘 할 필요도 없다고 한다. 아내와 나는...............
ㅎㅎ 글을 쓰는 데 또 행복하다. 적당히 쓰고 끝낼라 했는 데 그 때들을 하나하나 떠올려보니 너무 행복하다.
다시 이 회사로 돌아갈 마음은 없지만 하여튼 행복하다.
아내와 나는 멕시코에 대해 알아봤다. 특히 아내가 갖고 싶거나 먹고 싶은 걸 이것저것 찾아보며 관심을 보였다. 교직원에서 중소기업직원이 된 남편을 여전히 똑같이 대해줬던 것 같다. 그런 아내에겐 늘 고맙다.
멕시코 출장을 위해 인천공항으로 가며 많은 생각을 했고 일기도 썼던 것 같다. 그 일기가 지금도 있는 진 모르겠다. 전화위복이라는 사자성어가 떠올랐다. 국내 출장도 많고 해외 출장도 있는 회사에 다니게 되니 행복했다. 멕시코 가기 직전인가 직후인가에는 회사 옥상에서 바베큐 파티도 했었다. 사람들이랑도 쉽게 친해졌고, 고기도 맛있게 먹었다. 교직원땐 회식에서 좀 불편했다. 억지로 술도 권했다. 여기선 그런 게 없었다. 물론 그로부터 2년 뒤 사장이 술을 권하긴 했으나 다른 분이 잘 넘겨주셨다. 하여튼 재밌는 일들이 많았다.
미국을 경유해서 멕시코를 가는 일정이었다. LA 도착했는 데 유심은 안 되고 시간은 없는 상황이라 막 뛰어다니고 어버버 하고 바빴다. 살짝 울 뻔 했다. 그래도 무사히 만났고, 맛있는 고기도 얻어 먹고 즐거웠다. 한국어 되는 멕시칸이랑 있는 것도 재미있었다.
늘 즐겁진 않았다. 생각보다 프로그램이 잘 안 되서 스트레스도 받았고, 아내랑 떨어져 있으니 외롭기도 했다. 아내도 힘들어 하는 것 같았다. 데모용 프로그램 돌리는 거라 별 거 없을 줄 알았는 데, 너무 안 되니 힘들었다. 어느 부분에서 안 되는 지 정확하게 알려주고 보고해야 하니 계속 테스트했다. 그러니 진이 빠졌다. 데모 프로그램 때문에 출장 일정을 연장할 순 없었다. 이런 D-day에 대한 압박은 심했다. 회사에서 직접적으로 뭐라고 한 건 없었다. 그래도 나 스스로가 압박을 느꼈다. 현지에서 만난 부장님이 PLC 파트 버그를 고쳐주고 난 PC파트를 검사했다. 간단한 건 내가 고쳤고, 아닌 건 메일을 보내면 본부장님이 답변을 주셨다.
어떤 날은 말실수해서 부장님께 탈탈 털리기도 했다. 다음날 되니 미안하다며 맛있는 걸 사주셔서 다시 기분이 좋아졌다. 그 곳의 멕시칸이랑 대화도 어려움이 없었다. 한국어가 멕시칸이 있으니 대화가 수월했다. 그 분이 없을 땐 영어로 떠듬떠듬 대화하며 친분을 유지했다.
우여곡절끝에 모든 일정을 마치고 귀국했다. 비행기 타고 갈 때도 즐거웠지만 돌아갈 때도 즐거웠다. 한편으론 휴가를 마치고 출근하는 기분이 들기도 했다. 한국으로 오니 걱정도 많아졌다.
마냥 즐겁진 않았다. 많은 일들이 있었다.
어쨌든 난 프로그래머를 그만뒀다.
극적인 사건이 있었던 건 아니다.
좀 기분나쁜 말을 듣긴 했지만, 어쨌든 짤린 건 아니다.
화를 한 번도 안 내시던 본부장님한테 털리던 날은 너무 무서웠다. 검수 리스트에 있는 내용을 보며 검수를 해야 하는 데, 내가 똑바로 못한 것이다. 검수 내용 자체가 이해가 안 되니 제대로 못한 것이다. 20살이신 분도 한 분 계셨었는 데, 그 분도 하는 걸 나도 못한 것이다. 제대로 검수 안 했다고 혼났다.
내가 많이 간 국내 출장지가 두 군데였다. 특히 한 군데는 거기서 살다시피했다. 출장 거리가 애매해 출장비가 지급되지 않았다. 그 곳 탈의실에 쪼그려 자며 밤을 샜다. 밤새 돌아가는 생산라인을 지켜보며 집에 갔다. 어떤 날은 집에 가려고 하다가 작업자 전화 받고 돌아와서 집에 돌아가는 버스를 놓친 적도 있다. 한 번은 택시를 탔지만 계속 택시를 탈 순 없었다.
나머지 한 군데는 처음 갔을 땐 여러 모로 힘들었다. 거기서도 내가 신입이라서 안 좋아했고, 나도 그 곳이 생각보단 까다로운 것 같아 힘들었다. 그러나 시간이 갈수록 그 곳에선 날 인정해줬다. 내가 그만두던 날 그 곳 실무자에게 전화하니 매우 아쉬워했다. 연락은 안 하지만 아마 연락한다면 반가워 해줄 것 같았다.
멕시코 말고도 많은 출장지를 갔다. 인도도 가봤고 폴란드와 독일을 가봤다. 처음엔 신입 말년이다보니 여러 사람 눈치를 봤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 수록 사람들이랑도 편해지고 친해졌다. 그러다보니 출장가며 수다도 많이 떨었고 재밌었다. 개인적으론 인도의 채식음식이 내게 맞았다. 브라만이 아니면 육식을 한다는 데 육식은 내게 맞지 않았다. 현지 인도식 그 것도 브라만이 먹던 음식이 내게 딱 맞았다. 멕시코 음식도 입맛에 맞았다. 둘 다 음식에 고수가 들어가는 데 난 어렸을 적부터 그 걸 좋아했기에 딱 좋았다. 독일이나 폴란드는 별로였다. 폴란드는 좀 괜찮았는 데 독일은 정말 별로였다. 거기서 먹은 음식 중 제일 맛있는 건 스시였다.(...) 참고로 폴란드에서 먹은 음식 중 제일 맛있는 건 스테이크(...)였다.
두 번째 멕시코 갔을 땐 별별 경험을 다 했다. 한국말 되는 멕시칸이 일을 그만둬서 좀 고생했다. 근데 재밌는 경험도 많이 했다. 두 번째 출장지는 내 기억상 몬떼레이였다. 고객사는 한국이었다. 한국 회사가 멕시코에 공장을 새운 것이다. 정말 황당한 건 도착해보니 전기랑 공압도 연결되지 않았단 것이다. 근데 이런 일이 비일비재하다고 한다. 사람들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출근해서 노가리까고 집에 갔다. 할 일 없는 데 할 일 쓰느라 힘들었다.
시간이 애매하니 토요일은 다같이 놀러갔다. 일요일은 교회서 예배를 드렸다. 한인 교회서 예배드리는 데 너무 좋았다. 밥도 맛있었고 사람들도 좋았다. 내가 머물던 곳의 사장님이 그 교회 교인이라 그런지 날 더 좋게 보셨다.
처음 멕시코 출장지는 과달라하라였다. 법인장님이 연락이 왔다. 과달라하라 출장을 와달라는 것이다. 몬떼레이 일정이 꼬여서 과달라하라에서 3일간 머물렀다. 결과적으로 한 일은 크게 없었다. 뭔가 고친 것도 있고 아닌 것도 있었던 것 같다. 영어가 딸리니 많이 힘들었지만, 신기한 건 어떻게든 의사소통을 했단 것이다. 이 때 크리스천인 멕시칸이랑 같이 수요예배도 갔다. 말은 1도 안 통했지만 같이 예배드리고 기도했다. 기도 분위기가 정말 뜨거웠다. 나보고 한 마디 하라그래서 '헤수스' 한 마디 하고 따봉을 했더니 다들 박수를 쳐줬다. 이 크리스천 멕시칸이 공항으로 태워다 준 날 서로를 위해 기도도 해줬다.
다시 몬떼레이로 돌아왔다. 공압도 되고 전기도 된다. 근데 이젠 장비 하나가 안 오고 있단다. 내가 다니던 곳의 장비는 다 있었다. 근데 어떤 회사는 사람만 와있고 장비는 안 온 것이다. 그 분은 정말 할 게 없는 상황인 것이다.
공사 현장의 하늘, 노을은 너무 아름다웠다. 건물이 지어지다 만 상태인 데 사람들을 이렇게 부른 것도 신기하고, 풍경도 신기했다. 그냥 모든 게 신기하고 즐겁고 재밌었다.
2주차 한인 교회에선 예배 마치고 선교도 갔다. 선교라기 보단 시골 교회에 같이 가서 예배 같이 드리고 식교재하는 것이다. 내겐 그 것조차 신선했다. 풍경들이 너무 신기했고, 사람들도 좋았다. 현지분들이 해주시는 얘기들도 들으니 재밌었다. 데킬라의 원료가 되는 용설란도 직접 봤다.
만남이 있으면 헤어짐이 있는 법, 결국 장비 세팅은 어떻게든 다 하고 헤어졌다.
난 그 출장지에서 멕시칸 아주머니들이랑도 친해졌다. 그 중 한 분은 식당 아주머니셨다. 식사 시간이 되면 한국인들은 전부 한식을 받는 데 나만 현지식을 받았다. 그러니 멕시칸 식당 아주머니께서 날 신기하게 보셨다. 그렇게 친절한 분은 아니셨던 것 같은 데 날 유독좋아해주셨다. 알고보니 내가 자기 조카인가? 누구랑 닮아서 그렇단다.
멕시코나 인도에선 대체로 좋은 일만 있었던 것 같다. 근데 막상 한국에 돌아와서 이들을 팀뷰어로 지원하는 건 매우 고역스러운 일이었다. 시차가 나니 힘들고 직접 볼 수 없으니 더 힘들었다. 그 일이 언제 끝날지 모른다는 확신도 날 힘들게 했다. 해외 업체를 팀뷰어로 지원하는 게 꽤 스트레스였다. 내가 이 회사를 그만둔 것도 이 팀뷰어 때문이기도 하다.
이렇게 두서없이 적곤 있지만 나중에 기회가 된다면 순서있게 다시 적고 싶다. 그래서 책으로 내면 재밌을 것 같기도 하다. 아닐 수도 있겠지만, 그냥 재밌을 것 같기도 하다. 베스트셀러 내서 대박내고 돈방석에 앉음 좋겠다.
다음 글에서 남은 이야기들을 적어야 겠다. 한 글이 길어지는 게 비일비재하지만, 너무 길어지니 쓰는 내가 거부감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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