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31일 권고 사직을 받고, 이직할 시간이 주어졌다. 감사하게도 내가 이직할 시간을 충분히 주겠다고 하여서 편하게 면접을 여기저기 다녔다. 사람인, 잡코리아 그리고 인쿠르트를 가입하고 여러 회사를 둘러 보았다. 어딜가든 못할 것 같기에 이대로 주저 앉고 싶었다. 1월 31일까지만 다니고 그만뒀는 데, 내가 원한다면 시간을 더 주고 싶어하기까지 했다. 생각할 수록 마음이 훈훈하다.
구직이 시작되자, 내가 그만둔 그 스타트업이 너무 생각났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구직전부터 계속 생각났다. 나와 비슷한 나이 또래의 사람들이랑 일하면서 화기애애했던 분위기가 생각났다. 그리고 연봉 역시 만족스러웠기에 계속 생각이 났다. 내가 보기엔 그 곳은 매우 잘 될 곳 같았다. 어쨌든 기도했었을 당시에 그 곳에서 계속 일하라는 응답도 받은 것 같았기에 더욱 미련이 남았다.
그래서 용기를 쥐어짜내서 연락을 드리고 다시 찾아 갔다. 예상대로 그 곳은 좀 더 성장한 듯 하였다. 뭔가 바빠 보였고, 다들 열정이 넘쳐 보였다. 그래서 더 멋있어 보였다. 내가 있을 곳은 저 곳이며, 저기서 다시 시작하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하지만 여전히 두려움이 가득하였다. 나를 내보낸 곳도, 내가 나간 이 곳도 결국 내게 큰 기대를 했던 곳이다. 한 곳에서는 내 실체가 드러났던 것이고, 한 곳에서는 내가 먼저 도망친 것 뿐이었다. 그리고 다시 상기하자면 이 스타트업에서 요구한 일은 내가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웹에 대한 지식도 전무하고 시스템 구축도 전혀 몰랐다. 그런데 웹 페이지를 만들고, 서비스를 할 수 있게끔 이끌어야 하니 너무 어려웠다. 게다가 안드로이드와 iOS에 모두 대응되는 앱도 만들어야 했다. 안드로이드도 누가 만들어 놓은 거 하나 유지보수 한 게 전부인 내가 할 수 없는 일이었다. 할 수 있다하더라도 버그 투성이일 것이 불보듯 뻔했다.
대표님은 고민해보겠다고 하셨다. 연봉을 깎아서라도 다시 들어가고 싶었다. 그리고 내 수준에 맞는 연봉을 받으며 내 수준에 맞는 일을 하고 싶었다. 팀장급은 원하지도 않고, 그냥 팀원이라도 되고 싶었다. 기대는 받고 싶지 않았다. 팀원이 되더라도 잘 할 수 있을까? 걱정도 됐다. 또 짤리면 어쩌지 라는 걱정도 들었다. 하지만 이정도 연봉이면 좀 짤리더라도 괜찮을 것 같았다. 다른 곳은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며칠이 지났을까, 실무자를 통해서 연락이 왔다. 대표님이 원하시는 언어랑 내가 할 수 있는 언어가 달라서 아쉽게도 함께 할 수 없단다. 오히려 마음이 편했다. 들어가게 되더라도 욕먹고 짤리진 않을까 걱정했다. 내 실체가 드러나기 직전에 도망친 곳이기에 더 그랬다. 더 이상은 기대받고 싶지도 않았고, 더 이상은 들키고 싶지도 않았다. 그렇기에 차라리 홀가분했다. 내가 봐도 대표님이 원하는 수준은 박사급 or 최소 과장급의 인력이었다. 개발 연차로 치자면 최소 10년차는 되어야 했다. 물경력 10년차 말고 잘 배우고, 잘 이끌어 본 경험이 있는 그런 리더가 필요했던 것이다. 내가 싫어서 그런 게 아니라고 말해주니 마음도 편했다. 그래서 좀 더 홀가분한 마음으로 이직 준비를 계속 하였다.
참고로 스타트업 회사랑 한 번 더 인연이 닿는다. 이직한 회사에서 한 1년 정도 일을 했을 당시였다. 이번엔 거기서 내게 먼저 연락을 했다. 같이 일할 사람이 필요하며, 사람을 더 데려와도 된다고 했다. 내 지인 2명을 더 데려갈 수 있다고 하니 마음이 끌렸다. 하지만 지인들은 생각보다 적극적이지도 않았고, 그들 나름의 생각과 계획이 있었다.
지금 생각해보니 진짜 미안해진다. 왜냐면 처음 연락받을 땐 갈 것처럼 얘기해놓고서 나중에 거절했기 때문이다. 내가 거절을 한 이유는 외주 개발을 해줘야 할 일이 많아 졌다는 것과 내가 팀장으로 가야한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그 곳에선 역시 내게 많은 기대를 하고 있었다. 설상가상으로 지인들도 모두 안 간다고 하니 나 역시 무서웠다. 최악의 경우엔 나 혼자 모든 걸 다 해야 하기 때문에, 그 부분이 너무 무서웠다. 아무리 생각해도 너무 무서웠다. 그래서 정중하게 죄송하다고 말하며 거절하였다.
이 스타트업은 결국 인연이 아닌 것 같다. 근데 지금 국비 학원에서 일을 하니 어쩌면 인연이 닿을 수도 있겠다. 행정 절차때문에라도 실무에서 일하시는 분이 짧게라도 강의를 진행해주셔야 하기 때문이다. 학생들에게도 간접적으로 도움이 되기도 한다. 하지만 이 역시도 추억은 추억으로 남겨놔야 할지도 모르겠다. 내가 2번이나 퇴짜를 놨고, 한 번 거절 당한 곳이기에 마음이 여러모로 껄끄럽다. 그래도 늘 응원한다. 그만둔 내가 땅을 치고 후회할 정도로 그 회사가 너무나도 잘 됐으면 좋겠다. 그래서 더 이상은 스타트업이 아닌 좋은 큰 기업이 되길 바란다. 그래야 나도 마음이 더 편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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