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크라이나라는 나라 자체를 잘 몰랐다. 2006 월드컵 때 우리를 탈락시킨 스위스를 이기고 8강에 진출한 나라가 우크라이나인 것도 최근에서야 알았다. 우즈베키스탄은 좀 들어본 것 같은 데, 이 나라는 왠지 익숙하지가 않았다. 어디에 있는 지도 모르는 이 나라는, 작년 초부터 전 세계적으로 유명해졌다. '상남자' 푸틴이 NATO동진에 분노하여 우크라이나를 위협하고 있다는 것이다. 잘은 모르겠지만 3차 세계 대전까지 일어날 정도로 심각한 일이란다. 심란한 마음에 잠도 못 잤던 것 같다.
처음엔 쉽게 생각했다. 그냥 NATO 가입 안 하면 되는 거고, 러시아랑 사이좋게 지내면 되는 거 아니냐고 생각했다. 이 나라의 대통령은 코미디언 출신이라고 하니 더 우습게 여겨졌다. 비정치인 출신이라 그런지 외교를 잘 못했다고 생각했다. 지인들로만 꾸려진 이 정당은 이제 망할 것이고, 다 같이 도망칠 것이라고 생각했다. 우리의 '상남자' 푸틴은 한다면 하는 성격이니 알아서 빨리 기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우크라이나에 대해 알아볼수록 외면할 수 없었다. 우리나라와 일본의 관계 못지않게 앙숙인 두 나라 사이를 보니 남의 일 같지 않았다. 그들이 왜 유로마이단 혁명까지 일으켜가며 러시아에게 벗어나고 싶은 지 이해가 됐다. 분명 미국과 러시아 등은 이들이 핵을 포기할 경우 보호해 주겠다 약속까지 했다. 이런 상황에서 크름반도는 강제 합병되고 돈바스엔 내전이 생겼다. 보호 약속은 어디로 가고 오히려 더 뺏어먹으려는 러시아가 야속해 보이기까지 했다. 저렇게 땅이 넓고 자원도 많고 강한 나라가 뭐가 아쉬워서 저러는지 이해가 안 갔다. 이젠 러시아가 이해가 안 간다. 러시아도 러시아 나름의 이유가 있을 것이다. 지극히 사적인 러시아를 읽어 보면 러시아의 입장도 이해는 간다. 그래도 지금 푸틴의 행동은 정당화될 수 없는 것이다.
이대로 러시아가 전 세계 패권을 장악하는구나 싶었다. 군사력 차이는 천문학적이고 서방 세계의 움직임은 소극적이었다. 경제 제재만 한다고 할 뿐 아무런 액션도 취하지 않았다. NATO고 아니고 EU도 아닌 우크라이나를 보호해 줄 명분이 없는 것이다. 코미디언 출신 대통령 젤렌스키는 필사적으로 연설을 하며, 사람들을 설득했다. 이때까진 많은 사람들이 젤렌스키를 탓했다. 왜 괜히 상남자 화나게 해서, 불난 집에 기름을 붓고 있느냐고 생각했다. 한 사람이라도 더 살리기 위해선 그냥 빨리 항복이나 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우려하던 전쟁은 결국 터져버렸다. 어느 정도 예측은 했지만 설마 했던 전쟁이 진짜 일어난 것이다. 역시 상남자. 하지만 이 상남자를 이젠 하남자로 만들어 버린 남자가 있었다. 바로 코미디언 출신 대통령 젤렌스키다. 당연히 도망칠 줄 알았던 코미디언은 이 순간 왕으로 거듭난다. 최악의 대통령, 이상한 이유로 된 대통령등으로 조롱의 대상이던 대통령은 진정 왕이 될 자격이 있는 남자가 된 것이다. 결사항전의 의지로 수도 키이우를 탈환한 우크라이나 국민들은 순식간에 훌륭한 안목과 국민성을 가진 사람들이 됐다.
"내게 필요한 것은 탈 것이 아닌 탄약입니다"라는 말도 가슴을 울린다. 하지만 전시 상황에서 대피하지 않고 맞서는 그의 투지는 외국인인 우리들의 마음에 불씨를 일으켰다. 피난 행렬로 줄을 지은 우크라이나인 중 일부는 다시 돌아와 조국을 위하여 싸웠다. 그래서 하르키우와 같이 주요한 도시를 탈환하는 데 성공한다.
나 역시 진심으로 응원했다. 젤렌스키의 투지에 마음이 동한 서방 세계는 각종 제제의 무기 지원으로 우크라이나를 지원하였다. 자신의 나라를 버리고 도망만 가고 훈련도 받는 둥 마는 둥 했던 아프가니스탄과는 매우 대조적이었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는 말이 떠오르는 감동적인 순간들이 모이고 모였다.
시간 앞에 장사는 없다. 서방을 비롯한 나의 마음 역시 점점 식어갔다. 기억은 하고 뉴스는 보나 열렬히 응원하진 않았다. 누가 돼도 좋으니 빨리 끝났으면 좋겠단 생각이 들기도 했다. 진정한 왕이 된 젤렌스키가 아집이 있는 독재자로 보이기까지 했다. 전쟁이 시작되면서 폭삭 늙은 그의 얼굴 때문에 더 그런 생각이 들었다.
점점 그와 그의 나라를 잊어갈 때쯤 이 책을 만나게 됐다. 요즘 마음이 식은 것에 대한 죄책감으로 이 책을 eBook으로 구매했다. 연설문이라기에 별로 기대는 없었다. 내가 들은 연설문은 교장선생님의 말씀 혹은 지금 직장에서 아침마다 듣는 대표와 이사장의 훈화말씀이 다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연설문은 많이 달랐다. 연설문인데도 불구하고 너무나 잘 읽혔으며 가슴에 불을 지폈다. 우크라이나와 매우 먼 곳에 사는, 아시아 변방에 사는 나의 마음마저도 움직이게 한 것이다.
"이제는 아닙니다. 우리의 답은 명확합니다. 우리는 '살아서' 자유를 누릴 것입니다." (9. 우크라이나는 위대함을 원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우크라이나는 위대한 나라가 되었습니다, 영국 의회 연설 2022.3.8 화상 연결)
"우리는 절대 항복하지 않습니다."(같은 연설문)
"중재는 국가와 국가 사이에 가능한 것이지 선과 악 사이에 하는 것이 아닙니다"(12. 무관심은 사람을 죽입니다, 이스라엘 의회 연설, 2022.03.20, 예루살렘 화상 연결)
2월 24일, '절대로 Never'라는 말이 지워졌습니다. 새벽 4시, 우크라이나 국민 전체를 잠에서 깨게 한 수백 발의 미사일을 맞고 사라졌습니다. 이제 우리에게 남은 것은 '다시 Again'뿐입니다.
(15. 다시는, 절대로, 우크라이나의 '추모와 화해의 날' 연설, 2022.5.8, 보로디안카)
군사 시설도, 비밀 기지도 아니고 9층짜리 아파트 건물일 뿐입니다. 이 아파트가 러시아의 안보에 위협이 됩니까? 지구 면적의 8분의 1을 차지하고, 세계에서 두 번째로 큰 규모의 군대를 가진 나라에 말입니까? 이것보다 더 황당한 주장이 어디 있겠습니까?(같은 연설문)
"전쟁을 끝내기 위해 필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과거에 우리는 그것이 '평화'라고 했습니다. 이제 우리는 '승리'라고 말합니다."(16. 자유로운 국민, 우크라이나 독립기념일 연설, 2022.08.24, 키이우)
이 외에도 나의 마음을 움직인 수많은 문장들이 있다. 만약 우리나라에도 이런 지도자가 있었다면 일재 시대가 조금 더 달라지지 않았나 싶은 생각도 들었다. 과거는 과거일 뿐 무의미한 생각이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뭐가 있을지 고민된다. 다만 내가 바라는 것은 이제는 그와 그의 나라가 잊히길 진심으로 바란다는 것이다. 하루빨리 평화가 찾아와서 얼른 이 뜨거운 연설과 멋진 연설을 한 이 대통령을 머릿속에서 지우고 싶다. 그런 평화가 하루빨리 오길 기대한다.
"여러분이 손에 들고 있는 이 책이 출간될 일이 없었더라면 저는 아마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었을 겁니다."(과거를 바꾸는 일, 서문)"
만약 평화가 오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의 바람대로 우크라이나를 잊지 않을 것이다. 하루속히 평화가 오길 바란다.
"우크라이나를 잊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우크라이나에 지치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우크라이나인의 용기가 '유행이 지난 것'이 되도록 내버려 두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크라이나를 지지하는 일은 유행도, 온라인에서 인기 있는 밈meme이나 챌린지도 아닙니다. 우크라이나에 대한 지지는 지구를 가로질러 빠르게 확산되었다가 망각의 저편으로 빠르게 사라지는 충격파가 아닙니다. 우크라이나인들이 어떤 사람들이고, 어디에서 왔으며, 무엇을 원하는지, 또 어디로 가고 있는지 알고 싶다면 먼저 저희에 관해 아셔야 합니다. 이 책이 바로 그 일에 도움이 될 것입니다."(같은 부분)
"무엇보다도 저희의 메시지를 들어주십시오. 2022년 우크라이나 독립기념일에 크고 분명하게 울려 퍼진 메시지, 러시아의 마지막 병사가 우크라이나 땅을 떠나는 순간까지 퍼져 나갈 메시지 말입니다."(같은 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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