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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왜 프로그래머를 그만두었는가?(完)

나는 왜 프로그래머를 그만두었는가? (9)

대학원 스토리가 거의 끝났다. 간단하게만 말하자면 난 학회 복이 좀 있는 편이었다. 산업기능요원하기 전에도 제주도와 프랑스를 다녀온 기억이 있다. 프랑스 니스에 갔는 데, 이 때 기억이 진짜 너무 좋아서 박사도 하려고 하고 영어 공부도 열심히 하려고 했다. 하지만 실천에 옮기지 못 했다. 영어라도 열심히 했더라면 미래가 달라졌을까? 모르겠다. 허접한 논문 써서 제주도도 다녀오고, 방장형이 자기 논문의 2저자로 챙겨줘서 팔자에도 없던 프랑스를 다녀왔다. 이 시기에 알게된 프랑스 선교사님과 지금까지 연락을 주고 받고 있다. 살면서 프랑스 갈 일이 있을지 모르겠으나, 이 때의 추억 역시 내 보물 중 하나다.

 

청년취업아카데미라는 곳에서 교육생을 모집했다. 취업 관련 교육이라니 나도 참석했다. 설문지를 하길래 난 내가 희망하는 회사를 적었다. 그런 데 그 곳에서 연락이 온 것이다. 그렇게 경상대 학생들과 함께 C 교육을 들었다. 이제 여기만 믿고 열심히 하면 에트리에 갈 수 있을 줄 알았다. 아내는 빨리 취준을 하라고 하였으나 난 그말을 듣지 않았다.

 

코린이들과 함께 배우는 C 언어 시간, 교수님의 동기부여시간, 그리고 적당한 친목들이 좋았다. 하지만 그 행복은 오래가지 못했다. 난 다이아몬드부터 헤매기 시작했고, 점점 따라가지 못했다. 그리고 내가 미국을 다녀온 게 이 시기쯤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그래서 수업도 많이 빠졌었다. 실력이 생각보다 부실한 데다가 수업 참여도 못 하니 얻는 게 없었다. 그리고 C 강의 해주시는 교수님께 물어보니 에트리는 박사급들도 계약직으로 가는 곳이란다. 아니 그러면 날 왜 뽑은거야. 뒤늦게 후회하며 아내말을 듣고 여기저기 원서를 넣었다. 청년취업아카데미 총괄해주시는 분이 이력서는 딱 한 번 봐줬다. 별로 도움은 안 됐고, 그 분이 치킨같은 거 사주면서 신입땐 야근을 해야 한다고 말해준 게 기억에 남았다. 공감이 되면서도 씁쓸했다.

 

이 시기에 교직원이 신의 직장이라는 말이 유행이었다. 특히 사립교직원이 그렇게 좋단다. 돈도 더 받고 일은 공무원처럼 한다니 얼마나 좋은가? 하지만 난 이런 저런 핑계를 대며 원서 접수를 막 하진 않았다. 그러다가 나중에 시간이 쫓겨서 여기저기 원서를 접수했다. 어딜 가야하는 지 모르겠지만 그냥 여기저기 접수했다. 과동기들은 이미 대기업 입사해서 자리도 잡았고 고수들이 되어 있었지만 난 여전히 중소기업 출신의 하급 프로그래머였다. 대기업은 힘들다는 정신승리를 하며 그래도 다니기 좋은 중소기업을 찾아 다닌 것 같았다.

 

이런 간사한 내게 기적같은 일이 두 개 찾아왔다. 하나는 그토록 선망하던 사립 교직원 전산실 면접 자리가 잡힌 것이고 또 하나는 스타트업에서 입사제의가 왔다는 것이다. 내가 지원하지도 않은 회사에서 먼저 연락이 온 것이다. 첫번째는 그렇다쳐도 두번째는 왜 기적같은 일이냐고? 내가 생각없이 부른 연봉이랑 거의 비슷한 금액으로 맞춰준다는 것이다. 게다가 내가 일하는 곳이랑 추구하고자 하는 것이 좀 비슷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