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나는 왜 프로그래머를 그만두었는가?(完)

나는 왜 프로그래머를 그만두었는가? (13)

12월 31일 권고 사직을 받고, 이직할 시간이 주어졌다. 감사하게도 내가 이직할 시간을 충분히 주겠다고 하여서 편하게 면접을 여기저기 다녔다. 사람인, 잡코리아 그리고 인쿠르트를 가입하고 여러 회사를 둘러 보았다. 어딜가든 못할 것 같기에 이대로 주저 앉고 싶었다. 1월 31일까지만 다니고 그만뒀는 데, 내가 원한다면 시간을 더 주고 싶어하기까지 했다. 생각할 수록 마음이 훈훈하다.

구직이 시작되자, 내가 그만둔 그 스타트업이 너무 생각났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구직전부터 계속 생각났다. 나와 비슷한 나이 또래의 사람들이랑 일하면서 화기애애했던 분위기가 생각났다. 그리고 연봉 역시 만족스러웠기에 계속 생각이 났다. 내가 보기엔 그 곳은 매우 잘 될 곳 같았다. 어쨌든 기도했었을 당시에 그 곳에서 계속 일하라는 응답도 받은 것 같았기에 더욱 미련이 남았다.

그래서 용기를 쥐어짜내서 연락을 드리고 다시 찾아 갔다. 예상대로 그 곳은 좀 더 성장한 듯 하였다. 뭔가 바빠 보였고, 다들 열정이 넘쳐 보였다. 그래서 더 멋있어 보였다. 내가 있을 곳은 저 곳이며, 저기서 다시 시작하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하지만 여전히 두려움이 가득하였다. 나를 내보낸 곳도, 내가 나간 이 곳도 결국 내게 큰 기대를 했던 곳이다. 한 곳에서는 내 실체가 드러났던 것이고, 한 곳에서는 내가 먼저 도망친 것 뿐이었다. 그리고 다시 상기하자면 이 스타트업에서 요구한 일은 내가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웹에 대한 지식도 전무하고 시스템 구축도 전혀 몰랐다. 그런데 웹 페이지를 만들고, 서비스를 할 수 있게끔 이끌어야 하니 너무 어려웠다. 게다가 안드로이드와 iOS에 모두 대응되는 앱도 만들어야 했다. 안드로이드도 누가 만들어 놓은 거 하나 유지보수 한 게 전부인 내가 할 수 없는 일이었다. 할 수 있다하더라도 버그 투성이일 것이 불보듯 뻔했다.

대표님은 고민해보겠다고 하셨다. 연봉을 깎아서라도 다시 들어가고 싶었다. 그리고 내 수준에 맞는 연봉을 받으며 내 수준에 맞는 일을 하고 싶었다. 팀장급은 원하지도 않고, 그냥 팀원이라도 되고 싶었다. 기대는 받고 싶지 않았다. 팀원이 되더라도 잘 할 수 있을까? 걱정도 됐다. 또 짤리면 어쩌지 라는 걱정도 들었다. 하지만 이정도 연봉이면 좀 짤리더라도 괜찮을 것 같았다. 다른 곳은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며칠이 지났을까, 실무자를 통해서 연락이 왔다. 대표님이 원하시는 언어랑 내가 할 수 있는 언어가 달라서 아쉽게도 함께 할 수 없단다. 오히려 마음이 편했다. 들어가게 되더라도 욕먹고 짤리진 않을까 걱정했다. 내 실체가 드러나기 직전에 도망친 곳이기에 더 그랬다. 더 이상은 기대받고 싶지도 않았고, 더 이상은 들키고 싶지도 않았다. 그렇기에 차라리 홀가분했다. 내가 봐도 대표님이 원하는 수준은 박사급 or 최소 과장급의 인력이었다. 개발 연차로 치자면 최소 10년차는 되어야 했다. 물경력 10년차 말고 잘 배우고, 잘 이끌어 본 경험이 있는 그런 리더가 필요했던 것이다. 내가 싫어서 그런 게 아니라고 말해주니 마음도 편했다. 그래서 좀 더 홀가분한 마음으로 이직 준비를 계속 하였다.

참고로 스타트업 회사랑 한 번 더 인연이 닿는다. 이직한 회사에서 한 1년 정도 일을 했을 당시였다. 이번엔 거기서 내게 먼저 연락을 했다. 같이 일할 사람이 필요하며, 사람을 더 데려와도 된다고 했다. 내 지인 2명을 더 데려갈 수 있다고 하니 마음이 끌렸다. 하지만 지인들은 생각보다 적극적이지도 않았고, 그들 나름의 생각과 계획이 있었다.

지금 생각해보니 진짜 미안해진다. 왜냐면 처음 연락받을 땐 갈 것처럼 얘기해놓고서 나중에 거절했기 때문이다. 내가 거절을 한 이유는 외주 개발을 해줘야 할 일이 많아 졌다는 것과 내가 팀장으로 가야한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그 곳에선 역시 내게 많은 기대를 하고 있었다. 설상가상으로 지인들도 모두 안 간다고 하니 나 역시 무서웠다. 최악의 경우엔 나 혼자 모든 걸 다 해야 하기 때문에, 그 부분이 너무 무서웠다. 아무리 생각해도 너무 무서웠다. 그래서 정중하게 죄송하다고 말하며 거절하였다.

이 스타트업은  결국 인연이 아닌 것 같다. 근데 지금 국비 학원에서 일을 하니 어쩌면 인연이 닿을 수도 있겠다. 행정 절차때문에라도 실무에서 일하시는 분이 짧게라도 강의를 진행해주셔야 하기 때문이다. 학생들에게도 간접적으로 도움이 되기도 한다. 하지만 이 역시도 추억은 추억으로 남겨놔야 할지도 모르겠다. 내가 2번이나 퇴짜를 놨고, 한 번 거절 당한 곳이기에 마음이 여러모로 껄끄럽다. 그래도 늘 응원한다. 그만둔 내가 땅을 치고 후회할 정도로 그 회사가 너무나도 잘 됐으면 좋겠다. 그래서 더 이상은 스타트업이 아닌 좋은 큰 기업이 되길 바란다. 그래야 나도 마음이 더 편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