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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왜 프로그래머를 그만두었는가?(完)

나는 왜 프로그래머를 그만두었는가? (11)

합격 전화를 받고, 그냥 거절해버릴까 고민도 했었다. 하지만 전화해 주신 분이 나랑 같이 일하고 싶다고 하셨다. 게다가 고민할 시간도 충분히 준다고 하시니 이 부분이 너무 매력적이었다. 스타트업 회사는 졸업 하고, 근로장학생 끝내고 오겠다는 나를 하루라도 빨리 데려오려고 하였다. 그리고 뭔가 급해 보였다. 한 쪽은 조급해보이고 한 쪽은 느긋해 보인다. 그러니 느긋한 곳에 끌렸다.

 

나를 비싼 연봉에 모셔오신 사장님께선 내가 조금이라도 더 있길 바랐다. 하지만 난 그 값을 할 자신이 없었다. 그만둘 땐 내 적성 타령을 하며 그만두었다. 그리고 교직원 생활이야 말로 딱 내 적성이라고 생각했다. 생각해보니 아름다운 마무리는 아니었던 것 같다. 하지만 추후에 우린 다시 만나게 되며, 사장님은 그 때의 원수(?)를 갚게 되신다.

 

나는 개발보단 디버깅과 유지보수에 자신 있었다. 전자과 학생과 C++ 프로젝트를 할 때도 핵심 코드는 걔가 다 짰지만 걔가 C로 다 짜놔서 난 그걸 C++로 컨버팅을 하였다. 근데 지금 생각해보면 걔가 나보다 프로그래밍을 훨씬 잘한 것 뿐이다. 하여튼 병역특례때도 거의 유지 보수만 하다보니 유지보수에 자신감이 붙은 것 같았다. 교직원 역시 잘 깔려진 전산을 유지보수만 하면 되는 줄 알았다. 아니 실제로 그렇기도 했다. 하지만 생각지도 못한 변수가 많았다.

 

바로 의사 소통이다. 나는 말귀를 못 알아듣는 편이다. 어린 시절부터 지금까지 말귀를 못 알아들어서 구박을 많이 들었다. 하지만 그만큼 날 좋아해주는 사람도 있었고, 날 구박하는 사람은 지금까지 잘 피하고 살아 남았다. 병특 때 같이 일했던 분도 나때문에 힘들다고 말했지만 결국 그 분이 더 좋은 곳으로 가셨다. 나 때문에 갔다기 보다는 글자 그대로 더 좋은 곳으로 가신 것이다. 그래서 이 문제를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입사 초엔 너무 행복했다. 아내가 추천해준 직장이었고, 아내가 선망하던 직장이며 나 역시 선망하였다. 신의 직장에 들어가니 어깨가 으쓱하였다. 게다가 딱 1명 뽑는 자리에 내가 들어간 것이니 자랑스러울 만 하다. 서류 마감 직전이라 급하게 서류 내느라 사진을 확대해서 냈다. 스캔도 못 뜬 것이다. 당연히 서류 탈락이라고 생각하였지만 면접을 보게 되었다. 면접때 이에 대해서 물어봤고, 나름 잘 대답했다. 그래서 합격했나 싶었다. 

 

OJT 기간도 좀 길었다. 스타트업이랑은 모든 게 달랐다. 배울 사람이 있었으며, 내가 못하면 나를 백업해 줄 사람들이 있었다. 교내 식당도 내가 졸업한 곳보다 훨씬 맛있었다. 점심 후 후식먹고 수다 떠는 것도 즐거웠다. 사람들도 유쾌했고 재밌었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불안하였다. 이 학교를 졸업해서 계약직으로 들어온 사람들보다 내가 개발을 더 못하는 것 같았다. 실제로도 그랬다. 그 사람들은 개발을 즐겼지만 난 그렇지 않았다. 내가 즐겼던 건 오직 동아리 활동뿐이었다.

 

불길한 예감은 늘 맞는 법이다. 이런 행복은 오래가지 못했다. 본격적으로 업무에 투입되기 시작하면서 욕을 먹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내가 생각한 교직원 이미지와 이 곳은 좀 달랐다. 달랐다기 보다는 내가 '신입'으로서의 마음가짐을 갖지 못한 것 같았다. 내가 생각하는 교직원 이미지는 칼퇴가능하고, 회식 같은 건 참석하지 않아도 되며 프리한 곳이었다. 생각해보니 업무에 투입되기 전에 팀장님께 크게 혼이 났다. 

 

트라우마와 쓴뿌리가 올라와서 타임테이블이 정확히 기억은 안 난다. 하지만 존경하고 선망하던 팀장님이 무서워지고 싫어지던 시기는 이쯤이었다. 그의 독특한 키보드 소리를 좋아하였으나, 그 소리가 미친듯이 거슬리기 시작하였다. 내가 혼난 지점은 2개다.

 

하나는 회식에 빠지려고 했었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말귀를 너무 못 알아 들었다는 것이다. 

 

괴롭다. 얼른 써야겠다. 여기 그만두고 간 곳은 그래도 좋은 기억이 많은 곳이다.

아니, 어쨌든 안 좋았으니까 그만두고 지금 국비학원에서 일하겠지.